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서창동 관내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높이 백여 미터의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그 모습이 수려하고 골짝이 깊어 임진왜란 때의 공신 삽봉 김세근 장군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김세근 장군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때 김일손 선생이 조의제문 사초 사건에 연루되어 참살 당하는 화를 입자 종6품 벼슬인 종부시 주부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마륜동을 떠나 이곳 서창 관내 세동 마을로 옮겨왔다. 김 장군은 관직에 있을 때 이율곡 선생과 같이 외침에 대비한 양병론을 주장했으나 태평시대에 양병은 부질없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이라는 간신배들의 반대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늘 외침을 염려한 김장군은 임란 4년 전부터 마을 뒷 백마산 골짜기에 연병장을 설치하여 용력있는 장정들을 규합하여 무술을 연마하기에 힘썼으니 차츰 그 소문이 퍼지고 김장군의 애국충정이 널리 알려져서, 나주, 화순, 담양 등지에서까지 수많은 장정이 모여들었다.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전 금산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김장군이 장정을 훈련시킨 백마산 골짜기를 「수련골」이라하고 세동 마을에서 절골로 넘는 고개를 「수련재」라고 부르며 장정들의 숙소와 휴식처로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과 그 당시 사용했던 「옥동샘」이라는 우물, 백마산 상봉에 깊이 3미터 가량의 바위굴이 있는데 김장군이 이 굴에서 기거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하여 「장수굴」이라 이르게 되었다.

참고로 백마산은 그 모양부터가 새끼 말을 거느린 어미 말을 닮아 우리에게 무척 친근감을 주고, 그리 높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서 오르기에 알 맞는 산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팔월 추석이 되면 인근 마을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이 산에 올라 눈앞에 확 트인 서석들을 내려다보고 「맑은 가을날」의 하루를 보내면서, 김 장군의 위업을 되새기고 기리는 것이 연례행사로 되어 있었다.

김 장군의 뛰어난 용력을 찬양하는 전설 하나가 또 있는데, 백마산 자락 동하마을 김성(김장군의 후손)의 집에 큰 바위 한 개가 끼워져 있는데, 그 옛날 마을 뒤 백마산 산중에 살던 김장사(김세군 장군을 지칭함)와 무등산에 사는 김장사(김덕령 장군을 지칭함)가 힘겨루기를 하였다. 백마산 김장사가 백마산에서 던진 바위는 무등산에 그대로 떨어지고, 무등산 김장사가 무등산에서 던진 바위는 목표 지점(백마산) 좀 못 미쳐 이 마을에 떨어졌는데, 김성 집 담에 박힌 큰 바위가 그것이며, 힘겨루기 결과는 무등산 김장사가 지고 백마산 김장사가 이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