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광주가 기록상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동성왕 20년(498)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탐라가 공부(貢賦)를 잘 닦지 않으므로 동성왕이 친정(親征)에 나서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는 사신 을 파견하여 사죄함으로 이를 중지하였다.」

서창마을센터 앞 전경

이 기록은 백제시대에 광주는 무진주로 불렸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지역이 탐라의 조공을 걷어 들이는 경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 당시에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광주는 백제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호남의 중심부였을 것이다. 백제의 행정구역 편제는 수도를 5부로 나누고 지방은 5방으로 구획하여 다스리며 그 밑에는 군·현을 두었다. 전남지방은 남방인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했을 것으로 보이며, 14군 44현의 행정단위가 있었는데 광주와 무등산을 중심으로 무진주·복룡현(고마산현 : 현 광산구 송정·평동·삼도)·굴지현(현 : 담양군 창평·고서)·수천현(수인현 : 현 광산구 본량·임곡)이 있었다.

소금박물관과 태평염전으로 유명한 신안군 증도로 가는 길목인 지도읍은 한때 독립된 군(郡)이었던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나주나 함평 혹은 무안에 속했던 이 지역은 대부분 섬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1896년에 이르러서야 독립된 행정단위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초대 지도군수로 오횡묵(吳宖默)이 부임했다. 그해 9월 오횡묵은 지도군의 상급지관인 전라남도 관찰부가 있는 광주로 업무 보고를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 그의 여정에는 여러 명의 수하들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타고난 기록광이었던 오횡묵은 지도관아를 나서 광주까지 오는 며칠간의 여정을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그 기록이 오롯이 그의 책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瑣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