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송호영당
봉산사

박상(朴祥:1474∼1530)은 조선전기의 사림파 인물로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충주이다. 그의 선대는 충청도 회덕에서 살았는데, 부친 박지흥(朴智興)이 광주 방하동(현재 서창)으로 이사해왔다. 그래서 박상은 서창(西倉) 사동(寺洞) 마을에서 1474년(성종 5)에 태어났다.

학업을 7년 연상의 큰 형 박정(朴禎)에게서 닦았다. 22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501년에 27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32세 되던 1505년(연산군 11)에 전라도사(全羅都事, 오늘날 전라도 부지사에 해당)가 되었다. 그해 8월에 나주에서 우부리(牛夫里)라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그때 우부리의 딸이 연산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우부리는 그것을 믿고 천민의 신분으로 하늘 높을 줄 모르고 포악하게 날뛰었다. 우부리는 남의 토지를 약탈하고 심지어 남의 부녀까지 겁탈하였으나, 연산군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 그의 죄를 다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박상은 이에 개의치 않고, 나주에 와서 錦城館(금성관, 나주 객사) 뜰에서 우부리를 장살로 처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연산군이 박상을 체포하여 오라고 명령하였다. 박상은 화를 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상경하고 있었는데, 나졸들과 길이 엇갈려 체포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이로 보아 그의 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세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신비복위 상소를 올리다

종중반정은 1506년에 일어났다. 이전부터 진성대군(중종)의 부인이었던 신씨 비(愼氏 妃)가 반정 직후에 진성대군이 국왕으로 추대됨과 동시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반정공신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에 의하여 신비(愼妃)는 폐출되었다. 그들은 반정 당시에 신수근(愼守勤)에게 반정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신수근은 매부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사위인 진성대군을 국왕으로 즉위시키는 일에 나설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신수근을 살해하고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이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로서 궁중에 있는 것이 정치적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들은 신비가 반정에 동조하지 않은 죄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사실을 문제 삼아 신비 폐출을 중종에게 강요하여 실현하였다.

그 이듬해 1507년에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이때 마침 자연재해가 심하여 중종은 신하들에게 구언(求言)에 응하도록 하였다. 담양부사로 재임 중이던 박상은 8월 8일에 이웃의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국왕의 구언에 응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이때 무안군수 유옥(柳沃)도 상소문을 올리는 것을 논의하였으나, 박상⋅김정 두 사람의 명의로 상소문이 올려졌다. 이 상소문이 그 유명한 신비복위상소(愼妃復位上疏)이다. 신비는 바로 연산군 때에 좌우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로서 중종의 원비(元妃)를 가리킨다.

박상은 이 상소문에서 전 왕비 신씨를 복위시키고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상은 “부부의 도는 인륜의 시작이고, 온갖 가르침의 근원이고, 기강의 첫머리이고, 왕도의 큰 발단”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배필인 신씨를 폐출시킬 때에는 대단히 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도 없이 신씨를 폐출시켰다고 말하였다. 당시 신씨를 폐출한 것은 반정공신들의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명분도 없이 국모를 폐출한 것은 천하고금의 대의를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죽었지만 그들의 죄를 다스려 관작을 추탈하여 당대와 만대에 걸쳐 대의는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의리(義理)에 합당한 일이므로 신씨의 복위와 함께 단행되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이처럼 신비복위상소에는 정계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반정공신들의 부도덕성을 폭로하여 그들을 퇴진시키고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진 사림(士林)의 정치의식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