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고경명(高敬命)

임란 의병장
제봉 사당_포충사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이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했다. 공조좌랑·전적·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를 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양(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양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박광옥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마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의 관군과 합세,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안영 등과 순절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서석록 〉,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 금산 성곡서원·종용사,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