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박광옥(朴光玉)

임란 의병장
수월당

박광옥(朴光玉:1526∼1592)은 본관이 음성이고,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4대조인 성균관 생원이었던 박계양이 광주에 처음 살기 시작하면서 그 자손이 광주 사람이 되었다. 박광옥은 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 관직)라는 관직을 역임한 박곤(朴鯤)과 찰방(察訪)을 지낸 윤인손(尹仁孫) 사이에서 1526년(중종 21)에 이장동 황산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나, 뒤에 서창 매월동 회산 마을로 이거하였다.

10세 때부터 유헌遊軒 정황(丁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21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광주 선도면(船道面:주의 서쪽 20리에 있고 나중에 방하동면·당부면과 함께 서창면에 편입)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560년(명종 15)에 광주 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광주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 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선도향약을 정하여 실시하기도 하였다. 1568년(선조 1)에 농사를 짓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개산방죽을 막고, 방죽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안에 수월당(水月堂)이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고봉 기대승, 사암 박순, 율곡 이이, 옥계 노진, 제봉 고경명, 칠계 김언거 등과 교유하였다.

1568년(선조 1)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며,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고려말에 이성계가 운봉 인월에서 왜구를 물리쳤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일제 강점기 때에 일제가 깨뜨려 땅에 묻었던 것을 파내어 전시하고 대신 새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를 세웠고, 운봉 향교를 중수하고 세금 여분 수백석의 곡물을 내어 유생들에게 공급하고 고을 안 자제를 뽑아 날마다 거처하며 공부를 하게 하였다. 고을을 떠난 뒤에 운봉 유지들이 선정비를 세워 그 치적을 기념하였고, 황산 서쪽에 용암서원을 건립하여 매년 제향하였다.

1578년 전라도· 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 정랑, 1580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 직강을 거쳐 영광 군수와 밀양 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 전주의 교수와 사예· 사섬시정· 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 옥사(일명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관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을 탄핵한 죄로 삭탈관직 되었다.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에 내려와 있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김천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향 선비 수 십 인을 거느리고 의병도청을 설치하였다. 선비들을 사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민가를 출입하며 의병을 불러 모으게 하니 원근에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로 인해 장정, 장비, 양식을 조달하니 의병이 이에 크게 힘입게 되었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의 무능을 탄핵했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 목사로 재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회재 사상 운리사

1602년(선조 35)에 광주 유림들이 박광옥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벽진서원을 세워 배향하였다. 1678년에 김덕령을 합사하여 사액을 받고 의열사로 고쳐졌다.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월 훼철령으로 의열사가 헐리고, 운리영당에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1999년 풍암지구 개발 사업으로 묘소와 영당이 편입되어 풍암동에 새로운 터를 잡아 묘소를 정화하고 운리사(雲裏祠)를 중건하였다. 저서로 『 회재유집』 이 남아 있고, 문집 목판은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