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선비의 길 ‘절골’

옛날 학자들은 대개 성품은 청직하지만 그 행동이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것이 흠이었다.
안다는 것이 자칫 이성에만 치우쳐서 결단을 저해하고 고고한 채 세상을 달관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장이 낳은 한말의 명유 현화 고광선 선생은 그 범주를 벗어난 인물이었다. 선생은 태생지인 압촌 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소위 을사오적에 의하여 일본과 보호조약이 강제로 맺어지고 민영환⋅조병세 등 애국지사들의 자결 소식을 듣고 분격한 나머지 홀로 압촌을 떠나 서창 용두동 봉황산 중턱에 초막을 짓고 은거의 숨은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학덕을 기리는 이 지방 선비들이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어느새 그의 산중 처소에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봉황산 일대는 글 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구국의 지조를 일깨우고 선비의 사상을 가르쳤다. 선생이 머문 봉황산 중턱에 왕릉처럼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국권회복을 획책하다가 슬픔 속에 가신 고종 임금을 몹시 흠모했던 선생은 그 바위를 고종 임금의 능묘로 삼고 조석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곡(哭) 하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으니 그 충절은 만인의 귀감이라 할 것이다.